8월 28일, 내 딸 탄탄이의 돌잔치 날이었다. 장소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사진은 어머니의 지인에게 부탁했고, 행사는 누나가 챙겼다. 나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7월 25일 아내의 생일, 8월 3일 내 생일, 그리고 8월 28일 딸의 생일이었다. 아내의 생일 즈음부터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고, 용량은 점점 늘어났다.
축하해야 마땅한 날임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장인, 장모, 처남을 만나는 것도 버거웠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내 가족이지만, 이제는 마주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려왔다. 돌잔치 사흘 전, 처남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딸의 얼굴에서 동생 얼굴이 자꾸 겹쳐 보여 아직은 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오지 않겠다는 말이 서운했으면서도 이해됐다.
당일, 장인과 장모는 네 시간을 달려 기저귀 여덟 박스를 차에 싣고 왔다. 손녀에게 줄 금수저, 처남이 전해준 금팔찌, 그리고 사돈에게 전하는 금목걸이까지 챙겨왔다.
사진 촬영은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 형이 맡아줬다. 순한 탄탄이는 다섯 번 옷을 갈아입고 다섯 군데 장소를 옮겨 다니며 사진 촬영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잔치는 탄탄이의 일 년을 담은 사진과 영상으로 시작됐다. 화면 속에는 아내의 모습과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이어진 돌잡이에서 탄탄이는 오래 망설이다가 연필을 잡았다. 웃음과 탄탄이의 미래에 대한 기원이 쏟아졌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며 웃는 자리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할머니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탄탄이는 기분이 좋아져 양가 어른들에게 재롱을 부렸다. “손녀가 우리를 잊지 않도록 자주 와야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장인, 장모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때 장모가 사진 속에 아내를 합성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생각이었는데, 장모가 대신 말해줘 고마웠다.
장인, 장모가 떠난 후 짐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선물받은 금목걸이 상자 속에 편지를 발견했다. 장모가 적은 글이었다. 투병 기간 동안 딸을 돌봐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그 편지를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돈의 딸이기도 하지만, 나의 며느리이기도 했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장인과 장모는 딸을 잃었고, 내 부모님은 며느리를 잃었다. 처남은 동생을, 누나는 올케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를 잃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모두에게 예쁜 손녀, 사랑스러운 조카, 소중한 딸이 생겼다.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안은 채, 새로운 생명의 첫 생일을 함께 축복하는 사람들. 딸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모두 축복의 자리에 앉은 ‘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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