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친구들을 만났다.
편한 듯 편하지 않은 관계가 있다. 나에게는 아내의 동네 친구들이 그렇다.
아내는 나보다 두 살 많다. 자연히 그 친구들과 그들의 남편들 역시 나보다 나이가 많다. 모이면 늘 내가 막내가 된다. 특히 남편들끼리 앉아 있으면 형들 사이에 낀 동생이 된다. 불편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완전히 편하지도 않았다.
아내와는 대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말이 잘 통하던 사람들이다. 오래 볼 사이라 생각하며 나름대로 맞춰왔다. 그중 한 커플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졌다. 함께 늙어갈 줄 알았다.
아내가 아팠을 때 그들은 매주 찾아왔다. 장례식 내내 자리를 지켰고, 이후에도 나와 탄탄이를 챙겼다. 시골까지 내려와 아이를 안아주고 시간을 보내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함께하면 할수록 아내의 빈자리가 또렷해졌다. 그 자리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확인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피하게 되었다.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은 늘 탄탄이를 물어봤다. 나는 그들의 경사에 참석하지 못한 날들을 마음속에 쌓아두었다. 한 번은 얼굴을 보고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녁 약속을 잡았다.
아내와 자주 가던 치킨집. 6시 30분 약속이었다. 퇴근 후 하나로마트에 들러 딸기를 샀다. 가장 비싼 것으로 두 팩을 골랐다. 옛 동네로 향하는 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하나로마트는 예전에 살던 집 앞에 있다. 집을 보는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다.
6시 20분 치킨집 도착. 잠시 차 안에 있다가 가게로 들어갔다. 손님이 다섯 명이라고 하니 4인석에 의자 하나를 더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홀 쪽에 혼자 앉았다. 술에 취해 웃고 있는 테이블, 아이와 함께 온 가족 테이블. 약속 시간은 지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괜히 심장이 빨라졌다.
늦는다는 연락이 따로따로 왔다. 출발이 늦었고, 길이 막힌다고 했다. 의자 하나를 더 끌어다 놓은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6시 50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전화가 왔다. 거의 도착했으니 잠깐 얼굴만 보자고 했다. 전해줄 것이 있다고.
급히 뛰어와 숨을 고르던 모습. 당혹스러운 표정. 내가 더 당혹스러웠다. 선물을 건네받고, 나는 딸기를 건넸다. 더 머물 수 없을 것 같았다. 차에 올라 바로 출발했다. 운전대를 잡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비겁하게 도망친 것은 아닐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내의 “으이그”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3월에는 탄탄이를 보러 시골로 오겠다고 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고마움과 불편함이 함께 있다. 이들은 내 친구라기보다 아내의 친구들이다. 나는 아직 그 경계를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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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산책을 했다.
이제 18개월이 조금 넘은 우리 딸. 에너지가 넘친다. 아무래도 기운이 많이 떨어진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자라다 보니, 유튜브와 텔레비전을 자주 접한다. 뭐라 하기도 애매한 위치라, 날이 따뜻해지면 딸을 데리고 계속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 주말은 내내 10도 이상으로 포근했다. 아침부터 딸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오전에 1시간 30분, 오후에 2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딸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걷고, 어디까지 갈지 함께 정했다. 결국 내가 먼저 지쳐 딸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나가는 자동차마다 손을 흔들고, 돌고래 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힘을 얻었다. 딸 덕분에 나 역시 햇빛을 쬐고 몸을 움직였다. 저 아이는 어디에서 저런 힘을 낼까. 어쩌면 저렇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할까. 함께 걷는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쳤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다시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운동하고 공부하고, 무너져 있던 나를 다시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 전 아내의 1주기였다. 그 즈음부터 아내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 밝은 모습이면 좋았겠지만, 꿈속에서도 병과 싸우고 있었다. 한밤중에 깨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거기서는 아프지 말지. 내가 또 도울 수 없다는 무력감과, 꿈속에서 함께였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잠에서 깨면 그 장면이 산산이 부서져 더 힘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 이유는 결국 탄탄이다.
탄탄의 손을 잡고,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고 싶다. 어느 날 아빠 손을 놓고 혼자 씩씩하게 걸어갈 그날까지, 나는 그 곁에 서 있을 생각이다. 특별할 것 없이, 그저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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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2024년 11월 16일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가을의 일요일이었다. 아내는 아기에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모유 수유를 했고, 수유 시간을 종이에 꼼꼼히 기록했다. 아침 수유를 마친 아기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곤히 잠들었다. 우리도 침대에서 조금 늦장을 부리다 배가 고파 밥을 해 먹기로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냉동 돈가스를 꺼냈다.
“내가 요리할 테니 쉬고 있어.”
그렇게 말했지만, 아내는 늘 그렇듯 함께 준비하자고 했다. 카카오 스피커로 주말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베란다와 부엌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맞바람이 들어오며 집 안 가득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돈가스를 굽고 보니, 소스가 없었다. 사 오겠다고 하자 아내는 굳이 그러지 말라며 케첩이나 있는 소스를 쓰자고 했다. 그때 문득 집에서 직접 소스를 만들 수 있다는 영상이 떠올랐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를 넣어 루를 만든 뒤, 케첩과 굴소스를 섞었다. 소스 맛을 본 아내는 말없이 와사비를 꺼내왔다.
밥은 냉동 밥을 데워서, 반찬은 무김치를 먹기 좋게 잘라서, 국은 오래 전 코스트코에서 사둔 수프 가루를 타서 준비했다. 음식이 맛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그 순간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이런 날들이 오래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기는 곤히 자고 있었고, 재즈는 잔잔히 흘렀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었다. 아내가 곁에 있던 어느 가을의 일요일이었다.

환자들끼리 돌잔치를 했다.
8월 28일, 내 딸 탄탄이의 돌잔치 날이었다. 장소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사진은 어머니의 지인에게 부탁했고, 행사는 누나가 챙겼다. 나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7월 25일 아내의 생일, 8월 3일 내 생일, 그리고 8월 28일 딸의 생일이었다. 아내의 생일 즈음부터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고, 용량은 점점 늘어났다.
축하해야 마땅한 날임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장인, 장모, 처남을 만나는 것도 버거웠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내 가족이지만, 이제는 마주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려왔다. 돌잔치 사흘 전, 처남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딸의 얼굴에서 동생 얼굴이 자꾸 겹쳐 보여 아직은 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오지 않겠다는 말이 서운했으면서도 이해됐다.
당일, 장인과 장모는 네 시간을 달려 기저귀 여덟 박스를 차에 싣고 왔다. 손녀에게 줄 금수저, 처남이 전해준 금팔찌, 그리고 사돈에게 전하는 금목걸이까지 챙겨왔다.
사진 촬영은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 형이 맡아줬다. 순한 탄탄이는 다섯 번 옷을 갈아입고 다섯 군데 장소를 옮겨 다니며 사진 촬영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잔치는 탄탄이의 일 년을 담은 사진과 영상으로 시작됐다. 화면 속에는 아내의 모습과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이어진 돌잡이에서 탄탄이는 오래 망설이다가 연필을 잡았다. 웃음과 탄탄이의 미래에 대한 기원이 쏟아졌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며 웃는 자리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할머니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탄탄이는 기분이 좋아져 양가 어른들에게 재롱을 부렸다. “손녀가 우리를 잊지 않도록 자주 와야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장인, 장모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때 장모가 사진 속에 아내를 합성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생각이었는데, 장모가 대신 말해줘 고마웠다.
장인, 장모가 떠난 후 짐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선물받은 금목걸이 상자 속에 편지를 발견했다. 장모가 적은 글이었다. 투병 기간 동안 딸을 돌봐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그 편지를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돈의 딸이기도 하지만, 나의 며느리이기도 했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장인과 장모는 딸을 잃었고, 내 부모님은 며느리를 잃었다. 처남은 동생을, 누나는 올케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를 잃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모두에게 예쁜 손녀, 사랑스러운 조카, 소중한 딸이 생겼다.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안은 채, 새로운 생명의 첫 생일을 함께 축복하는 사람들. 딸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모두 축복의 자리에 앉은 ‘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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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계속 살아가보기로 했다.
이 블로그를 마지막으로 쓴 지 어느덧 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2018년 12월 아내와 결혼했고, 세 번의 이사를 했다. 2020년 7월에는 고양이 달구를 입양했고, 작년 8월에는 너무나 예쁜 딸을 얻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딸의 100일 잔치날. 침을 맞으러 간다던 아내는 한의사의 권유로 대학병원을 찾았고, 응급실 CT 결과 ‘췌장암 의심’이라는 소견을 들었다. 결국 췌장암 간 전이, 손쓸 수 없는 말기라는 확진으로 이어졌고, 소견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아내는 멀리 여행을 떠났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게 무너졌다.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모르겠다. 수면장애, 우울증으로 정신과 다니며 약을 먹고 있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많았다.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아내,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생각하면 그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쯤 괜찮아질지, 과연 괜찮아질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두서없이 쓰는 글처럼, 하루하루도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 살아가며 느낀 것들, 그리고 아내와의 추억을 여기 남겨보고 싶어졌다.
지금 내가 정해둔 것은 단 한 가지다. “일단 계속 살아가보기로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하고, 그것을 흔적으로 남기는 일이다. 나는 그 흔적을 쌓아가려 한다. 그래서 오래전의 이름 ‘지속가능한 뻘짓’을 지우고, 이곳을 ‘act of doing’’이라 부르기로 했다. 더는 허망한 뻘짓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로, 작은 발걸음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언젠가 만날 아내에게 보여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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