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6일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가을의 일요일이었다. 아내는 아기에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모유 수유를 했고, 수유 시간을 종이에 꼼꼼히 기록했다. 아침 수유를 마친 아기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곤히 잠들었다. 우리도 침대에서 조금 늦장을 부리다 배가 고파 밥을 해 먹기로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냉동 돈가스를 꺼냈다.
“내가 요리할 테니 쉬고 있어.”
그렇게 말했지만, 아내는 늘 그렇듯 함께 준비하자고 했다. 카카오 스피커로 주말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베란다와 부엌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맞바람이 들어오며 집 안 가득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돈가스를 굽고 보니, 소스가 없었다. 사 오겠다고 하자 아내는 굳이 그러지 말라며 케첩이나 있는 소스를 쓰자고 했다. 그때 문득 집에서 직접 소스를 만들 수 있다는 영상이 떠올랐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를 넣어 루를 만든 뒤, 케첩과 굴소스를 섞었다. 소스 맛을 본 아내는 말없이 와사비를 꺼내왔다.
밥은 냉동 밥을 데워서, 반찬은 무김치를 먹기 좋게 잘라서, 국은 오래 전 코스트코에서 사둔 수프 가루를 타서 준비했다. 음식이 맛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그 순간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이런 날들이 오래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기는 곤히 자고 있었고, 재즈는 잔잔히 흘렀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었다. 아내가 곁에 있던 어느 가을의 일요일이었다.
8월 28일, 내 딸 탄탄이의 돌잔치 날이었다. 장소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사진은 어머니의 지인에게 부탁했고, 행사는 누나가 챙겼다. 나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7월 25일 아내의 생일, 8월 3일 내 생일, 그리고 8월 28일 딸의 생일이었다. 아내의 생일 즈음부터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고, 용량은 점점 늘어났다.
축하해야 마땅한 날임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장인, 장모, 처남을 만나는 것도 버거웠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내 가족이지만, 이제는 마주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려왔다. 돌잔치 사흘 전, 처남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딸의 얼굴에서 동생 얼굴이 자꾸 겹쳐 보여 아직은 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오지 않겠다는 말이 서운했으면서도 이해됐다.
당일, 장인과 장모는 네 시간을 달려 기저귀 여덟 박스를 차에 싣고 왔다. 손녀에게 줄 금수저, 처남이 전해준 금팔찌, 그리고 사돈에게 전하는 금목걸이까지 챙겨왔다.
사진 촬영은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 형이 맡아줬다. 순한 탄탄이는 다섯 번 옷을 갈아입고 다섯 군데 장소를 옮겨 다니며 사진 촬영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잔치는 탄탄이의 일 년을 담은 사진과 영상으로 시작됐다. 화면 속에는 아내의 모습과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이어진 돌잡이에서 탄탄이는 오래 망설이다가 연필을 잡았다. 웃음과 탄탄이의 미래에 대한 기원이 쏟아졌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며 웃는 자리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할머니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탄탄이는 기분이 좋아져 양가 어른들에게 재롱을 부렸다. “손녀가 우리를 잊지 않도록 자주 와야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장인, 장모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때 장모가 사진 속에 아내를 합성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생각이었는데, 장모가 대신 말해줘 고마웠다.
장인, 장모가 떠난 후 짐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선물받은 금목걸이 상자 속에 편지를 발견했다. 장모가 적은 글이었다. 투병 기간 동안 딸을 돌봐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그 편지를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돈의 딸이기도 하지만, 나의 며느리이기도 했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장인과 장모는 딸을 잃었고, 내 부모님은 며느리를 잃었다. 처남은 동생을, 누나는 올케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를 잃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모두에게 예쁜 손녀, 사랑스러운 조카, 소중한 딸이 생겼다.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안은 채, 새로운 생명의 첫 생일을 함께 축복하는 사람들. 딸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모두 축복의 자리에 앉은 ‘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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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계속 살아가보기로 했다
이 블로그를 마지막으로 쓴 지 어느덧 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2018년 12월 아내와 결혼했고, 세 번의 이사를 했다. 2020년 7월에는 고양이 달구를 입양했고, 작년 8월에는 너무나 예쁜 딸을 얻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딸의 100일 잔치날. 침을 맞으러 간다던 아내는 한의사의 권유로 대학병원을 찾았고, 응급실 CT 결과 ‘췌장암 의심’이라는 소견을 들었다. 결국 췌장암 간 전이, 손쓸 수 없는 말기라는 확진으로 이어졌고, 소견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아내는 멀리 여행을 떠났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게 무너졌다.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모르겠다. 수면장애, 우울증으로 정신과 다니며 약을 먹고 있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많았다.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아내,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생각하면 그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쯤 괜찮아질지, 과연 괜찮아질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두서없이 쓰는 글처럼, 하루하루도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 살아가며 느낀 것들, 그리고 아내와의 추억을 여기 남겨보고 싶어졌다.
지금 내가 정해둔 것은 단 한 가지다. “일단 계속 살아가보기로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하고, 그것을 흔적으로 남기는 일이다. 나는 그 흔적을 쌓아가려 한다. 그래서 오래전의 이름 ‘지속가능한 뻘짓’을 지우고, 이곳을 ‘act of doing’’이라 부르기로 했다. 더는 허망한 뻘짓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로, 작은 발걸음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언젠가 만날 아내에게 보여줄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