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글씨로 투박하게 HISTORY라고 적혀있고, 오른쪽 발 두 개가 위에 그려져 있는 이 노트를 나는 2010년 여름에 샀다. 강릉 포남동 청송아파트 옆 수협 골목으로 들어가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꽤 큰 규모의 문구ㆍ완구점이 있는데 현금으로 계산하면 항상 100원에서 많게는 500원까지 깎아줬다. 이 노트를 산 날, 자전거를 타고 0.5mm HB 샤프심과 지우개를 사러가서 공책을 구경하다가 충동적으로 샀던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거다.
그때 한창 좋아하던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있었다. 친구들보다 한 학기 먼저 대학교에 합격해 누구보다 마음 편하고 행복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 아이는 대학입시에 정신이 없었다. 대금을 부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어깨에는 항상 대금이 든 기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는 그 아이가 6시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매일 내가 츄파춥스 사탕 두 개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그 아이의 집까지 10분가량을 함께 걸어 데려다주고 30분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그 설렘이 좋았다.
그래서 이 노트는 2010년 6월 18일, 사춘기 막바지의 감성으로 쓴 <용강동 버스정류장>이라는 글로 시작한다. 그 이후로 이 노트는 지금까지 나의 고민, 감정들을 적는 비밀 일기장이 되었다. 그렇게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먼 타지에서 공부하며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함, 전 여자친구와 만남부터 이별까지 모두 담겨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한 이후로의 고민도 함께 담겨있다.
아직 반도 못쓴 이 노트를 잃어버리게 되면 마음이 참 아프면서도 나의 치부가 그대로 드러나 불안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노트를 애지중지 소중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이 노트의 마지막 장은 대학교 4학년 당시 공부했던 언어학 수업의 노트도 있고 중간중간 일하며 급하게 적은 메모도 많다.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그린 낙서도 있고 한자를 외우며 쓴 빽빽이도 있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마구 쓰는 노트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 부담없이 이런 글을 휘갈겨 쓸 수 있는 노트정도. 그냥 딱 이정도로 쓰는 노트인 것 같다.
- 2018. 6. 18. 이 노트가 나에게로 온지 8년째 되는 날을 자축하며
디아블로2를 지웠다.
요 몇 달 간 아침 6시 15분까지 출근을 하고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일 뿐만이 아니라 자투리 시간마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들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공부를 하고, 뭔가를 만들고,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시간들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많아봤자 9시간 정도 되는 것 같다. 8시간 자고, 먹고 싸는데 많이 줘서 1시간 주면 그렇다. 법적으로 정해져있는 근무시간이 8시 반부터 5시 반, 점심 먹을 시간 1시간 포함해서 총 9시간이다. 그중에서도 아무리 못해도 멍 때리는 시간이 2시간쯤 된다. 즉, 지금 나는 하루에 자투리 시간이 24시간 중에 7시간은 된다. 그런데 그 시간을 유튜브에서 소비적인 콘텐츠를 보는데 쓰고 있다. 얼마 전 부터는 퇴근을 하고 디아블로2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디아블로2를 처음 해봤다.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다른 게임은 안하고 이게임만 했다. 부모님이 컴퓨터 하는 시간을 하루 1시간으로 엄격히 제한하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주무실 때, 기회가 될 때마다 몰래 몰래 게임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문득 굉장히 허무해졌다. 게임을 아무리 많이 하고 열심히 해도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 게임을 하지 않았다.
요즘 그런 느낌이 또다시 든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아이디어들이 정말 많은데….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것 같다. 피곤해서, 스트레스 받아서라는 핑계를 뛰어 넘고 싶다. 그래서 디아블로2를 지웠다. 그래서 생각을 글로 꾸역꾸역 적어본다. 역시 아이디어와 글로 나오는 결과물은 많이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고 더 다듬고 싶은 글이지만, 그냥 업로드 한다. 전에 이야기 했듯이 계속 글을 쓰고, 계속 만들고 계속 올려야겠다. 항상 다짐으로 끝나는 것 같다. 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해보자면 비생산적인 시간들을 조금 줄여야겠다.
18. 1. 7.
2017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나는 굉장히 짜증이 나 있는 상태로 막히는 강남의 한 도로에 갇혀 있었다. 4개월 전부터 새로 시작한 업무는 ‘이제 좀 적응이 되었구나.’ 싶을 때마다 나를 엿 먹였다. 함께 일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나는 착한사람이라고 잘 포장을 해왔었는데, 일이 감당하기 힘들어 지니 숨기고 싶었던 나 자신이 계속 드러났다. 모든 것이 굉장히 잘못 되가는 느낌이었다.
문득 글을 써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문득’은 아니고 항상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표현하고 그걸 남기고 싶었는데, 직접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었다. 스스로 변명을 해보자면 시간이 없었고, 체력도 없었다…라기 보다는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점점 현실에 치이고 안주하게 된다. 발전이 없고 멍청해지고 있는 기분이다.
키보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이유는 좋은 키보드가 없어서야!' 라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그래서 이마트에 가서 무작정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8시 쯤 키보드를 사고 집에 들어가고 있는데, 여자친구에게 회식이 끝났다고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일렀다. 키보드는 풀어보지도 못하고 바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점심 이후에 배속에 들어간게 아메리카노 5잔 밖에 없다는 게 생각났다. 허기졌다. 회식이 끝난 여자친구와 김밥천국에 갔다. 라볶이와 김밥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회식에서 있었던 일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 화났던 일들…
이야기를 끝내고 집에 오니 10시였다. 문득 어두운 방바닥에 놓인 키보드를 봤다. 저 키보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은 희미해져 있었다. 컴퓨터를 키고, 키보드를 연결하고 이렇게 글을 쓴다. 두 번째 쓰는 기계식 키보드인데 느낌이 좋다. 타닥타닥. 나중에 시발비용으로 산 이 키보드 사용 후기를 써봐야겠다. 시발비용이라는 단어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참 재밌는 단어라고만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받아 지출하게 된 비용. 어쩌면 오늘 내 시발비용은 키보드 값 5만원이 아닌 저녁값 김밥천국 5천원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간 날 때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글을 싸질러야겠다.
1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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